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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 (尤庵 宋時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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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9.06.1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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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은 조선후기 문신, 도학자, 정치가로 1607년에 충청북도 옥천군 구룡리(九龍里)에서 태어나 1689에 생을 마쳤다. 자는 영보, 호는 우암이다.

어릴때 부터 총명하고 기골이 뛰어나게 장대하여,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으며, 어려서는 송이창에게  글을 배웠고, 25세경부터는 이율곡의 수제자인 충청도 연산의 김장생에게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김집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1633년(인조 11년)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여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그는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년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에게도 관직을 주어 불렀으므로 그는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1658년(효종 9년) 찬선에 등용, 이조판서로 승진, 효종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이듬해 효종이 죽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1668년(현종 9년)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그도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고, 1675년(숙종 1년) 정월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장기 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그는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 뒤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83세(1689년,숙종15년)에 왕세자(경종)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에서 사사(賜死)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그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직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사후에 정조는 '양현전심록'을 지어서  선생을 위하여 비문과 비를 내리고 선생의 문집인 '송자대전'을 간행토록 하였다.송시열을 송자로 부르는 것은 조선 후기에 송시열을 받드는 유학자들이 그의 위상을 공자와 맹자 등의 반열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저서에 송자대전(宋子大全),우암집(尤庵集),송서습유(宋書拾遺),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사계선생행장(沙溪先生行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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