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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 (朴文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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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8.05.2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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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 [朴文秀, 1691(숙종 17) ~ 1756(영조 32)]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본관은 고령(高靈).

1723년(경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로 뽑혔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기용되자 사서(司書)에 등용되어 영남암행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했고, 1728년 부교리를 겸하던 중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사로도순문사(四路都巡問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전공을 세워 경상도 관찰사에 뽑히고,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으로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1730년 대사간·도승지 등을 지내고, 충청도에 암행어사로 나아가 굶주리는 백성의 구제에 힘썼다. 1732년 선혜청당상, 1733년 예조참판·대사헌을 지냈으며 1734년 예조참판으로 있을 때 진주사(陳奏使)의 부사(副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1737년 병조판서가 되었고, 병조판서의 인신(印信)과 이군색(二軍色)의 인신을 만들어 줄 것을 주청하여 성사시켰다. 이듬해 동지사(冬至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으나, 안동서원을 철폐시킨 일로 탄핵 받아 풍덕부사로 물러났다. 1742년 병조판서로 있을 때 지리적 여건으로 봉군(烽軍)의 충원이 어려운 북도(北道)에 각지방에서 정배(定配)된 봉무사(烽武士)로써 변통할 것을 주청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1745년 어영대장,1748년 호조판서, 1750년 판의금부사, 1751년 예조판서 겸 세손사부(世孫師傅), 1752년 한성판윤 등을 두루 지냈다. 이해 내의원제조로 있을 때 왕세손의 죽음에 책임을 지고 제주도에 안치되었다가, 1753년 풀려나와 예조판서·우참찬에 올랐다.

정치적으로 소론에 속하였으며, 명문벌열(名門閥閱) 중심에서 벗어나 4색(四色)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의 실(實)을 강조하였다.또 농민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대표적인 부담으로서 군포의 폐단을들고, 이를 적절히 감면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지적했다

군정(軍政)과 세정(稅政)에 밝아 당시 국정의 개혁논의에 중요한 몫을 했다. 1749년 영조에게 주청하여 《탁지정례(度支定例)》를 출판하였고, 글씨로는 안성의 《오명항토적송공비》가전한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시호는 충헌(忠憲).

   

박문수 장원급제시
落照(낙조)  

落照吐紅掛碧山-지는 해는 푸른 산에 걸려 붉은 빛을 토하고

寒鴉尺盡白雲間-찬 하늘에 까마귀는 흰구름 사이로 사라지드라

問津行客鞭應急-나루터를 묻는 길손은 말채찍이 급하고

尋寺歸僧杖不閒-절로 돌아가는 스님도 지팡이가 바쁘구나

放牧園中牛帶影-놓아먹이는 풀밭에 소 그림자가 길고 

望夫臺上妾低髮-남편을 기다리는 대(臺)위엔 아내의  쪽 그림자가 나지막 하드라 

蒼煙古木溪南路-푸른연기에 싸인 고목 계곡 남쪽길에 

短髮樵童弄笛還-단발초동이 피리를 불며 돌아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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