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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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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8.05.0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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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勉吾). 아버지는 지평 충갑(忠甲)이다.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軍器寺)에 들어갔다. 1583년 귀화한 여진인 니탕개(尼湯介)가 회령(會寧)지방에서 난을 일으키자 정언신(鄭彦信)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1591년 진주판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목사 이경(李璥)이 병사하자 그 직을 대리하면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를 편성하였다. 이때 일본군이 사천(泗川)에 집결하여 진주로 향하려 하자,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하여 적을 격파하고 고성·창원 등을 회복했다. 이어 의병장 김면(金沔)과 함께 거창 사랑암(沙郞巖)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뒤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이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9월에는 진해에서 적을 물리치고 적장을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냈다. 이해 10월 적 2만여 명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성 안의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남장을 하게 하여 군사의 위용을 보이게 하는 등, 불과 3,800여 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쳤으나 이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고 며칠 뒤 죽었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되고, 그뒤 영의정에 추증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지금으로부터 400여년전인 1592년 4월에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적 왜군을 크게 물리친 전투가 3개 있는데, 이순신장군의 한산도 대첩, 권율장군의 행주산성대첩, 그리고 김시민장군의 진주성대첩, 이를 일컬어 壬亂三大捷(임란3대첩)이라 한다.

일본이 역사책에 '임진란 때 진주에서만 대패했다.' 라고 기록할 정도로 참패했던 전투가 바로 진주성 전투였는데, 3,800여명의 소규모 군대로 그 8배에 가까운 3만여명의 정예 왜군을 패퇴시켰기 때문이다

장군은 25세때인 1578년(선조11년)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으며, 訓練院主簿(훈련원주부)를 제수 받아 봉직하였다. 부임해 보니 軍器(군기)는 녹슬고 軍紀(군기)는 해이하여 일조유사시에는 쓸만한 병기와 군인이 없음을 개탄하여 마지 않았다. 이를 본 장군은 이대로 두었다가는 언젠가 큰일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어 국방의 최고책임자인 병조판서를 찾아 뵙고

 "소관이 훈련원에 몸담아 보니 군기가 녹슬고 군인의 기강이 해이합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국가에 변란이라도 생긴다면 속수무책이 될 터이니 대책을 강구하셔야 됩니다." 라고 건의하였으나,  

병조판서는 "지금같이 태평성대에 군기를 보수하고 훈련을 강화하라니 올바른 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만약 훈련원 군사들을 조련하고 병장기를 만들면 백성들을 두려움속에 몰아 넣는 결과가 되리니 망언이로다." 하면서 젊은 혈기에 분별없는 소리를 한다고 질타하는 것이었다. 장군은 사리를 따져 재차 간곡히 건의 하였으나 병조판서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질책으로 일관하였다.

장군은 올바른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수모만 당하자 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서 군모를 벗어 병조판서가 보는 앞에서 발로 짓밟아 버리고 사직서를 써서 던져 버린후 훌훌히 일어서서 나왔다. 그 길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여러 해 동안 불우한 세월을 보냈다. 1583년 이탕개의 난 때 도순찰사 정언신의 막하 장수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그후 다시 벼슬길에 나가 軍器(군기)시 判官(판관)이 되었으며 1591년에는 진주판관으로 나가게 되었다.  장군은 부임하여 행정의 공명정대함이 먹줄과 같았고 덕의(德義)를 베풀어 위엄을 세우니 예하 장졸과 관속들은 두려워 하나 백성들은 감복하면서 평화스럽게 지낼 수 있었다.

장군이 진주판관에 부임한지 1년후인 1592년(선조25년) 임진년 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진주목사 이경이 병사하자 초유사 김성일의 명에 따라 진주목사 대행에 임명된 장군은 병기를 수리하고 성지를 구축하는 한편 수성군을 모집하여 진주성을 사수하고자 했다.

장군은 모집된 수성군에게 맹훈련을 시켰음은 물론 병기와 자재를 정비하고 양곡을 비치하였는데 염초 510근 제조 및 총통 170여자루를 제작하였다. 진주성은 지리적으로 호남에 이르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만약 이곳이 무너지면 왜적은 바로 호남지역을 휩쓸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장군은 의병장 김면의 요청에 따라 거창으로 나가 사랑암 부근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이 공로로 1592년 7월 26일 진주목사에 정식으로 임명됨). 9월에는 진해에서 왜군장수 평소태(平小泰)를 생포하여 의주 행재소에 보내 조정의 사기를 높여 주었으며(이로인해 경상우병사에 임명), 연이어 고성, 창원까지 진격하여 왜군을 무찌르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왜군은 김해, 고성, 창원 등 경상도 남부지역에서 연패하자 경상우도의 조선군 주력부대가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전세만회를 위해 이를 일거에 함락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왜군은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등원랑(藤元郞), 평조신(平調信)등을 주축으로 부산, 동래, 김해지역에 포진하고 있던 정예병 3만여명을 동원하여 1592년 10월 5일 진주성 공격을 개시하였다.

한편 진주성에는 김시민 목사의 본성군사 3,700명과 곤양군수 이광악의 100명등 도합 3,800명의 군사가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정병이라기 보다는 새로 모집한 장정들이었다.

 그러나 김시민 장군은 진주성민들의 필사적인 단결과 곽재우, 최강, 이달 등 각처 의병들의 열렬한 성원에 고무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진주성을 사수키로 결심한 후 화살하나 탄환 한발이라도 낭비하지 말 것을 지시하는 등 만반의 전투 준비를 갖추었다.

10월 5일 아침부터 왜군은 신식무기인 조총을 주무기로 3개부대로 나누어 공격을 감행하였다. 김시민장군은 적군의 화력을 최대한 소모시키고자 일정한 거리에 올때까지 대적하지 않고 성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위장하는 한편, 직접 성내를 순회하면서 임전태세를 점검하고 음식을 제공하는 등 장병위에 군림하기 보다는 자신도 병사와 같이 동고동락하면서솔선수범 하였다. 이와 같이 장군의 실천궁행 노력에 감복한 군사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죽기를 무릎쓰고  싸우게되었다.

결국 제1차 진주성전투는 의병들의 적극적인 성원에 힘입은 김시민장군의 탁월한 용병술과 전략술, 그리고 진주성내의 모든 군, 관, 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결사 항전한 결과 3만의 왜병중 2만여명을 죽거나 다치게 하는 등 대승을 거둠으로써 임진전란사에 3대첩의 하나로 찬연히 기록되기 되었다.

김시민장군은 전투가 거의 끝나가던 무렵인 10월 9일 전투지역을 순시하던 중 죽은체 하고 숨어 있던 왜병의 저격에 의해 이마에 총탄을 맞고 쓰러져 치료받다가 며칠후 39세의 아까운 나이로 운명하였다.

그후 조정에서는 장군의 공을 높이사 선조때에 宣武功臣(선무공신) 2등과 상락군에 추록하였으며, 숙종때에는 정1품인 領議政(영의정)에 추증하고 上洛府院君(상락부원군)에 추봉하였다.

김시민장군은 비록 39세의 젊은 나이에 陳沒(진몰)하였으나 그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올곧은 선비정신이 뛰어났으며 위난에 처하여 몸을 아끼지 않고 어려운 일을 함에 있어 병사와 백성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등 솔선수범하였다. 3,800명의 적은 군사로 8배에 가까운 왜병 3만여명을 맞아 다양한 전략전술로 적을 격퇴시킨 위대한 군사 전략가였다.

전투가 소강상태였으나 적의 저격 등 위험이 농후한 상황에서 예하장수를 시키지 않고 자신이 직접 전장을 둘러보며 부하장병들을 격려하고 무너진 성벽을 수리케 한 것은 위험을 무릎쓰고 맡은바 소임을 완수하려는 투철한 사명의식과 책인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또한 총탄에 맞아 쓰러져서도 싸워 이기겠다는 일념으로 국사를 근심하고 때때로 북향하여 절하고 눈물을 짓는 등 국가와 임금에 대한 애국충절의 정신이 남달랐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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