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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외교관, 충숙공 李 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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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5.02.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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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공 이 예(忠肅公 李 藝):조선 전기의 외교관으로 40여회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어 667명의 조선포로를 찾아오고 계해조약의 체결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한편, 세종임금의 명을 받아 대장경을 일본 국왕에게 전달하고 일본의 자전(自轉) 물레방아를 도입하고 사탕수수 재배를 건의하는 등 조선-일본 문화교류에 큰 업적을 남겼다.

고귀한 장인정신, 지극한 효성, 불굴의 의지, 애국심은 현대 우리 사회의 귀감이 되고 있다

충숙공의 본관은 학성(鶴城), 아호는 학파(鶴坡),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공은 1373년에 울산에서 출생, 1445년(세종27) 2월에 향년 73세로 별세하셨다.

대일 외교의 일선에서 조선 전기의 한일 문화교류에 크게 기여한 독보적 인물이며, 중인 계급인 아전에서 출발하여 종2품인 동지중추원사의 벼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기도 하다.

1396년(태조5; 24세) 12월에 3천명의 일본 해적이 울산에 침입하여 군수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울산의 여러 관리들은 모두 도망하여 숨었다.

그러나 공은 해적의 배를 바다 가운데까지 뒤쫓아 가서 군수와 같은 배에 타기를 청하였다. 해적이 그 정성에 감동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대마도에 이르러서 해적은 군수의 일행을 죽이려고 의논하였다.

그런데 공이 군수에게 여전히 아전의 예절을 지키기를 더욱 깍듯이 하는 것을 보고는 이에 감동하여 마음을 바꾸었다. 

이들은 죽음을 면하고 대마도의 화전포(和田浦)에 유치되었다. 나라에서 통신사 박인귀(朴仁貴)를 보내어 화해하게 되어, 이듬해 2월에 공은 군수와 함께 돌아왔다. 나라에서 공의 충절을 가상히 여기어 아전의 역(役)을 면제시키고 벼슬을 주었다. 

일찍이 공이 8세(우왕 6년; 1380년)때 모친이 해적에게 포로가 되었었다. 공은 어머니를 찾기 위해 조정에 청해 1400년(태종 즉위년; 28세)에 회례사(回禮使) 윤명(尹銘)의 수행원으로 대마도에 갔다. 집집마다 수색하며 어머니를 찾았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1401년(태종1년; 29세)에 보빙사로 일기도(壹岐島)에 파견되었으니 이것이 공의 처음 공식 사행(使行)이었다. 1443년(세종25; 71세) 체찰사로 대마도에 파견되었으니 이것이 공의 마지막 사행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공은 1401-43년의 43년간 40여회 일본(대마도-일기도-유구 포함)에 정사 혹은 부사로 파견되었다.

그 중 왕조실록에 사행의 활동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것만 해도 13회에 달한다(일본 국왕에 6회, 대마도-일기도-유구국에 7회). 왕조실록에는 44년간의 사행에서 공이 일본으로부터 쇄환해 온 조선인 포로는 모두 667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은 조선의 대일외교에서 가장 두드러진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었다. 조선 전ㆍ후기에 걸쳐 일본 국왕에게 파견된 사행은 모두 30회였는데 공은 이 중 6회의 사행에 참여하여 가장 파견빈도가 높다.

공은 또한 통신사란 명칭이 최초로 사용된 사행에 참여하였다. 조선 전기 200년간 대마도-일기도-유구국에 대한 사행은 40회(대마도33+일기도4+유구국3)였는데 공은 이 중 7회의 사행에 참여하여 가장 파견빈도가 높다. 

왕조실록에는 세종8년에 통신사로 일본으로 떠나는 공에게 임금께서 갓과 신을 하사하며 이렇게 당부하시는 모습이 나온다. “모르는 사람은 보낼 수 없어서, 이에 그대를 명하여 보내는 것이니, 귀찮다 생각하지 말라.”참으로 아름다운 군신간의 사랑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왕조실록에는 또 조선을 방문하는 대마도인의 체류기한을 제한하는 문제에 대해 세종께서 하문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모두 말하기를 ‘충숙공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다시 숙의하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공은 71세의 노구로 대마도 체찰사를 자청하며 세종께 이렇게 말한다. “신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이 섬에 출입하여 이 섬의 사람과 사정을 두루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신이 가면 저 섬의 사람들이 기꺼이 만나볼 것이며, 누가 감히 사실을 숨기겠습니까.”

위의 두 예화는 조정 중신들의 공에 대한 평가와 공 스스로의 자신감을 잘 나타내 보이고 있다. 

공은 한일 문화교류와 관련하여 다양한 방면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근세 이전 한일 관계에 있어 민간의 국제교류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임금이 파견하는 공식 사행은 일차적으로 정치. 외교적 기능을 수행하는 한편으로, 문화의 국제교류에 있어 거의 유일한 창구로서 기능하였던 것이다.

시문, 필담, 회화, 음악, 무용 뿐  아니라 농업기술, 광업기술, 무기, 음식 등에 있어서도 광범위한 문화교류가 사행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특히 대장경 및 불경의 사급(賜給)을 통한 불교문화와 인쇄문화의 전파,  일본식 자전 물레방아의 도입, 화폐의 광범위한 사용, 사탕수수의 재배와 보급에 대한 건의가 눈에 띈다.

사행은 또한 민간에 의한 광물채취자유화와 이에 대한 과세(課稅), 화통 및 완구의 재료를 동철에서 무쇠로 변경, 외국 조선기술의 도입 등을 건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행에서 예물의 교환과 물자의 교역을 통해 문물 및 문화의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사행의 접대를 통해 음식문화와 일상 생활문화의 교류도 이루어졌다(분광부자료발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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