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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白沙)이항복(李恒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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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8.08.3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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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경주(慶州). 자 자상(子常). 호 백사(白沙) ·필운(弼雲) ·청화진인(淸化眞人) ·동강(東岡) ·소운(素雲).

고려 말의 명신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참찬 이몽량(李夢亮)의 아들이며 권율(權慄)의 사위이다. 어렸을 때, 훗날 함께 재상이 된 이덕형(李德馨)과 돈독한 우정을 유지하여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의 일화가 오랫동안 전해지게 되었다.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81년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1583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후 저작(著作) ·박사 ·정언(正言) ·수찬(修撰) 등 언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1589년 예조정랑으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다스리는데 참여했다. 1590년 정여립의 옥사를 무난히 수습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따라 의주로 갔으며, 이후 병조판서가 되어 명나라 군대의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국왕의 근위병을 모집하는 데 주력하였다.

1595년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1598년 좌의정으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1599년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에 우의정이 되었으며, 1602년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진봉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대북파(大北派)들과는 정치적 입장이 달랐으며 1617년 이이첨(李爾瞻) 등이  주도한 폐모론(廢母論)에 적극 반대하다가 1618년 삭탈관직되었다.

이후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사후에 복관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임진왜란시에 5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선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전란 후에는 그 수습책에 힘썼다.

고향인 포천의 화산서원(花山書院)과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백사집》 《북천일록(北遷日錄)》 《사례훈몽(四禮訓蒙)》 등이 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선조조상신(宣祖朝相臣)>조에 행적이 소개되어 있다.

시호(諡號)는 문충공(文忠公)이며, 포천의 화산서원(花山書院)과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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