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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업(林慶業)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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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8.04.0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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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업(林慶業)(1594(선조 27) ∼ 1646(인조 24))

   

조선 중기의 명장으로 본관은 평택이며 자는 영백이고 호는 고송이다. 충주 달천촌 출생으로 판서 정의 7대손으로 황의 아들이다.

1618년(광해군 10) 아우 사업과 함께 무과에 합격하고 함경도 갑산으로 추방(새로이 무과에 합격한 자에게 관직을 제수하기 전에 의무적으로 부과하였던 일정기간의 추방)을 위하여 나갔다가 1620년 삼수의 소농보권관으로 부임하여 군량과 군기를 구비하는데 공을 세워 절충장군에 승서되었다. 그 뒤 첨지중추부사로서 인조반정공신인 김류의 막하에 있다가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에는 출정을 자원하여 정충신의 휘하로 들어가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 1등이 되고 가선대부에 올랐다.

이듬해 행첨지중추부사 겸 우림위장을 거쳐 방답첨사로 임명되었고 1626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전라병사 신경인이 좌영장에 임명하고 청군을 무찌르기 위하여 서울로 향하였으나 이때는 이미 주화파에 의하여 강화가 성립된 뒤여서 싸움 한번 하지도 못하고 군졸을 이끌고 낙안군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체찰부의 별장이 되었다.

1629년 용양위부호군으로 체찰부별장을 겸하고 이듬해에는 평양중군에 임명되었다.

1631년 검산산성 방어사에 임명되어 정묘호란 이후 퇴락한 용골·운암·능한산성등을 수축하였으며 정주목사에 승서 되었다. 그의 이와 같은 활약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정에서는 청천강 북쪽인 서북로의 군사력을 정묘호란 이후 큰 타격을 입어 한때 청북 포기의 의논이 일어났다. 즉 그 방어선을 청천강이남으로 후퇴시켜 안주중심의 방어를 펴는 동시에 강도와 남한산성을 수축하여 수도권 방어에 전념하려 하였다.

이에 대하여 청천강 북쪽의 백성들은 맹렬히 반대를 하였는데 이와 같은 청북인의 반대운동을 임경업이 뒤에서 조종하였다 하여 탄핵을 받고 구금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633년 2월 기복(상중에 벼슬에 나아감)하여 청북방어사에 임명되고 곧 안변부사를 겸하였다. 이때 백마산성에 웅거하면서 이를 수축하고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

그해 4월 명나라의 반장인 공유덕, 경중명이 우가장 앞바다를 경유하여 구련성으로 들어가 후금군과 통하려고 하였다. 이에 의주부윤 윤진경과 함께 이 사실을 명나라 대도독 주문욱에게 연락하여 이를 협격, 섬멸하였으나 명나라 장군간의 싸움으로 이들 반장을 잡는데는 실패하였다. 이 공로로 명나라 왕으로부터 금화와 많은 상을 받았고 명나라의 총병 벼슬을 받아 이때부터 임총병으로 명나라에도 크게 알려졌다. 그 뒤 아버지의 탈상을 위하여 고향에 왔다가 1634년 부호군에 복직되고 곧 의주부윤 겸 청부방어사에 임명되었으며 의주진병마첨절제사 까지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근거지인 백마산성을 방어하기에는 인적, 물적 어려움이 많았다.

그는 조정으로부터 백금(은을 말함) 1,000냥과 비단 100필을 받아 중국상인과 무역을 하여 이를 축적하는 동시에 유민을 모아 12곳에 둔전을 개설하여 안집해 살도록 하였다. 이 공로로 1635년 가의대부에 올랐다. 그러나 이와같은 무역거래는 지나치게 이익을 추구하였다는 책임을 물어 파직되었다. 이에 당시 도원수 김자점은 강력하게 그의 복직을 주장하여 1636년 다시 가선대부로 자급을 내린 채 의주부윤에 복직되어 압록강 맞은 편의 송골산·봉황산에 봉화대를 설치하는 등 국방태세를 강화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송골·봉황의 봉화대에서 연락을 받고 산성을 굳게지켜 적의 진로를 둔화시키는데 진력하였다. 청군은 임경업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포기하고 직접 서울로 진격하였으며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이듬해 정월에 주화론자인 최명길등의 주장으로 굴욕적인 화의를 성립시켰다. 그 뒤 청나라 태종은 조카인 요퇴로 하여금 300기의 정예 기병을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는데 그는 이 요퇴군을 맞아 압록강에서 쳐 무찌르고 잡혀가던 우리백성 남녀 120여명과 말 60여필을 빼앗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청나라는 명나라를 칠 전초전으로서 눈의 가시였던 가도에 주둔한 명군을 치기 위하여 1637년 2월 조선에 병력동원을 청해왔다.

이때 그는 수군장에 발탁되었으나 철저한 친명배금파 였으므로 선봉에 서는 것을 주저하였으며 명나라의 도독 심세괴에게 내통, 그들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게 하였다. 한편 피폐한 의주의 물적·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다시 상인들을 심양에 보내 물화교역으로 이를 해결하려 하였으나 이것이 청인에게 발각되어 인조의 노여움을 사 평안도의 철산으로 유배되었다. 한편 청나라에서는 여러 차례 명나라를 치기 위한 병력동원을 요청해왔으나 조정에서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청나라는 이것이 조약에 명시된 사항이라 하여 질책이 대단하였다. 비변사에서는 임경업의 죄를 용서하고 마침내 조방장으로 기용하여 그로 하여금 명나라를 치도록 하였다.

그는 군사 300명을 이끌고 구련성으로 나아가 진격하는 척 하면서 군사동원과 군량조달의 어려움을 들어 심양으로 나아가 이 사명을 완수하였다. 이 공로로 인조로부터 숙마 한필을 하사받고 의주부윤으로 복귀하였다가 9월 평안병사, 수군절제사 겸 안주목사로 승서되었다. 1639년 말부터 청나라는 명나라의 근거지인 금주위를 공격하기 위하여 다시 병력동원과 군량미의 원조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요청에 의하여 임경업을 주시상장, 황해병사 이완을 부장으로 삼았다. 이듬해 4월 그는 전선 120척, 격군 1,323명, 사수 1,000명, 포수 4,000명 화약 1만근, 철환 4만2000개, 조총 4,170정, 군량미 1만7,160석 그리고 세공청국미 1만석을 싣고 안주를 출발하여 금주위로 향하였다. 한편 재상이었던 최명길과 밀의하여 승려 독보를 보내어 이 사실을 등주의 명군문 흥승주에게 통고하게 하고 애써 싸우게 하지 않았다.

그해 7월 청나라는 범문정을 통하여 심양에 있는 세자에게 항의하였다. 그들은 임경업의 함대를 전진시키려 하나 전진하지 않고 세폐미를 요하 입구까지 운반하라고 하였으나 거절하고 또한 명나라 배를 만났으나 싸우지 않았으며 배가 표류하였다고 속여 두 사람을 몰래 명나라로 보내어 내통하였으므로 우리 조정과 서로 짜고 명나라와 내통한 것이라고 힐책하였다. 소현세자는 모르는 사실 이라고 극구 부인하였다. 이에 따라 범문정은 그들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재삼 임경업을 달래였으나 듣지 않았다.

7월14일 부장 이완은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임경업은 나머지 50척의 배와 1,500명의 선군 및 격국을 이끌고 개 주위에 이르러 배에 있던 세폐와 군량미를 모두 버리고 다시 해주위·이주위·금주위·대승보 등지로 진주하였으나 다만 청나라 장수의 지휘에 따라 진퇴를 같이 하였을 뿐 그 동안 한번도 명군과 싸우지 않았다.

1641년 정월 임경업은 배를 버리고 육로로 요양·심양·압록강까지 청나라의 허와 실을 일일이 정탐하면서 서울로 돌아왔다. 청나라에서는 그가 명나라와 내통하고 있는 사실을 눈치는 채고 있었으나 확증을 잡지 못하여 고민하였으며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압력으로 삭탈관직하였으나 그해 12월에는 행동지중추부사로 임명되었다.

1642년에 임경업의 청나라에 대한 비협조의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청나라의 금주위 공격으로 명장 홍승주가 청나라에 투항하자 그의 부하인 예갑과 선천부사 이계의 실토로 임경업이 승려 독보를 명나라로 파견한 전말을 알게되었다. 또한 그해 10월에는 정주의 고충원이 심양 감옥에서 이 사실을 목격하였다고 증언함으로써 그가 청나라에 협력하지 않은 죄상이 드러났다.

이러한 확증에 의한 청나라의 압력으로 조정에서는 형조판서 원두표로 하여금 임경업을 체포하여 청나라로 압송하도록 하였다. 압송도중 11월 6일 그 일행이 황해도 금천군 금교역에 이르렀을 때 임경업은 밤을 틈타 도망하였는데 그는 불잡히기 전에 심기원을 만나 그에게서 은 700냥과 승복 및 체도를 얻어 기회를 노리다가 붙잡혀 압송되던 도중 도망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는 명나라로 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위하여 처음 양주 회암사에 맡겨두었던 승복을 찾아 포천과 가평의 경제지대에서 승복으로 갈아입고 중이되어 양구현의 어느 골짜기에서 초막을 치고 겨울을 지냈다.

이듬해 정월 양양으로 갔으나 복병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양구로 돌아왔다가 사잇길로 상원으로 갔다가 다시 회암사로 숨어들어 탈출의 기회를 노렸다. 그 동안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독촉에 못이겨 그의 처를 비롯하여 형제 등 가족을 체포하여 청나라로 압송하였으며, 그의 처 이씨는 그 이듬해 9월 심양옥에서 자살하였다. 한편, 임경업은 1643년 5월 26일 김자점의 종이었던 상인 무금(일명 효원)의 주선으로 배 한 척과 사공 10명, 그리고 그의 군관이었던 이형남·박수원(일명 차자용)과 일찍이 사귀어온 임성기·최수명의 두 승려를 대동하고 상선을 가장하여 서울의 마포(일설에는 태안이라고도 함)를 출발하여 황해로 나아갔다.

그해 가을 중국 제남부의 해풍도에 표착하였다. 그곳에서 명나라의 수비대 군관인 곽이직의 조사를 받고 등주도독 황종예 군문의 총병인 마등고의 휘하에 들어가니 명나라에서는 그에게 평로장군(일설에는 부총병)을 내리고 4만의 병사를 이끌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청나라는 마침내 북경을 함락하였고 청 태종은 산해관으로 들어가니 도독 황종예는 남경으로 도망쳤다. 임경업은 마등고와 함께 석성으로 들어가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명나라 조정은 남경으로 갔으나 그곳도 곧 함락되자 마등고도 청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한편, 본국에서는 그의 후원자인 심기원의 옥사가 일어나 임경업이 연루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으나 그는 갈 곳을 잃어버렸다. 임경업은 이곳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독보에게 배의 주선을 부탁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마침내 그의 부하였던 장련포수 한사립의 밀고로 1645년 정월 명나라의 항장 마홍주에게 잡혀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청나라는 당시 섭정자 예친왕이 집권하면서 대사령을 내리고 임경업에 대하여도 그 재략을 아껴 과거의 일을 불문에 붙이려 하였다. 그러나 역관 정명수·이형장, 그리고 조선 김자점 등 반역 등 반역 부청배가 결탁하여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1646년 6월 임경업은 죄인이 되어 사은사 이경석에 의하여 본국으로 송환되었으며, 18일에 서울에 이르러 인조의 친국을 받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임경업을 심기원의 옥사에 관련시키려 하였다. 그는 심기원으로부터 은 700냥과 승복 및 체도를 받은 것을 시인하였으나 역모가담은 극력 부인하였다. 그러나 임경업이 달아날 당시 형조판서로 있다가 그 사건으로 파직되었던 원두표, 임경업과 지난날 가장 가까웠던 김자점이 이를 반대하고 죽여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김자점은 임경업이 평안병사 겸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도원수로서 서북면의 방어에 전 책임을 지고 있었고 임경업은 그의 막하로서 그를 따랐으며 임경업이 상인 잠송사건을 일으켰을 때에도 적극적으로 그를 옹호하여 형벌을 면하게 해준 장본인이었는데, 임경업을 죽여야 된다고 주장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즉, 임경업에게 배를 알선하였던 무금은 그의 첩인 매환의 오라비였고, 이들은 모두 김자점의 종이었으며, 임경업이 마포에서 탈출할 때 무금의 처에게 탈출사실을 김자점이나 그의 아들 식에게 알리라고 하였던 것이다. 결국, 임경업이 살아서 문초를 받게 되면 무금의 처도 문초해야 되고 무금의 처가 김자점에게 알렸다고 하면 김자점도 임경업의 탈출을 도운 결과가 되며, 그러면 심기원의 당으로 몰려 자기도 죽어야 된다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해 6월 20일 임경업은 심기원사건의 연류 및 자기 나라를 배반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가서 국법을 어겼다는 죄를 뒤집어쓴 채 형리의 모진 매에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숨지고 말았다. 그의 나이 53세였으며 고향인 충주의 달천에 장사지냈다.

임경업은 당시 친명반청의 사회분위기와 함께 우국충정에 뛰어난 충신이요 무장이었다. 그러나 가장 불행한 장수였다. 그가 명성을 떨치면서도 한번도 청나라와 싸움다운 싸움을 해보지 못한 불운의 명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분위기대로 의리와 명분에 투철하고 고집 센 무장이었지만, 당시 실제적인 국제정세, 즉 역사와 흐름에 어두운 장군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가 무능한 것이 아니라 이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그의 조국이 무능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미 망해 가는 명나라와 힘을 합쳐 청나라에 저항하여 병자호란의 부끄러움을 씻으려 하였지만 그의 조국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당시의 국민이나 조정의 감정과 함께 충의·지조, 그리고 용기등으로 점철되어 민족의 마음속에 자리하였으니 뒤에 그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고대소설 <임경업전>이 널리 읽혀졌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1697년(숙종 23) 12월 숙종의 특명으로 복관되었다. 충주의 충렬사, 선천의 충민사, 백마산성의 현충사, 겸천의 충렬사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이다. 장군의 사당인 충렬사는 사적 189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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