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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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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7.09.1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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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문신이자 무신으로 파평면 금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광탄면 분수리에 묘가 있다. 자는 동현, 호는 묵재, 본관은 파평, 고려 태조를 도운 삼한공신 신달의 고손이며   검교소부소감을 지낸 집형의 아들이다.

출생과 관련된 비화로 아버지 문정공이 용마를 타고 하늘을 날으는 꿈을 꾼 후에 부인 김씨에게 태기가 있어 낳았다고 한다. 일찍 학문에 눈이 트여 잠시도 책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특히 오경을 즐겨 봤다고 한다.

일곱살 되던 해 뽕나무를 소재로 하여 칠언절구의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술에도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073년(문종 27) 문과에 등과하여 습유 . 보궐을 지냈고, 1087년(선종 4)에는 합문지후로서 출추사가 되어 광주,충주,청주를 시찰하였다. 그뒤 좌사낭중으로 재직중이던 1095년 10월 숙종이 즉위하자 요나라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이어 1098년(숙종 3) 동궁시학사로서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숙종의 즉위를 통고하였고 이듬해 자치통감을 기증받고 돌아왔다. 이어 우간의 대부 한림시강학사가 되었으나 당시 좌간의 대부와 친척이었으므로 사간인 어사대와 같이 있을 수 없다는 중서성의 상소에 따라 해임되었다. 1101년에는 추밀원지주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왕명에 의하여 진사시를 주관하였으며 이어 어사대부가 되었다. 이듬해 이부상서 동지추밀원사를 거쳐 지추밀원사 겸 한림학사승지가 되었다.

1104년 2월 동북면행영도통으로 임명되어 이때부터 훗날 자신의 명성을 떨치게 된 여진 정벌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당시 북쪽 국경인 압록강에서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경계로 그 위쪽 지역에 살고 있던 여진족은 고려를 상국 혹은 모국이라 하여 조공도 바치고 더러는 귀화도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점차 국경 일대에 새롭게 일어난 동여진이 그 세력을 확대하고 고려의 국경 요새 등을 잠식하기 시작하였다. 1103년 부족장에 우야소가 그 자리에 올랐을 때에는 그 세력이 함흥 부근까지 들어와 주둔할 정도였다. 이리하여 고려군과 우야소의 여진군은 일촉즉발의 충돌 상태에 놓였으며, 1104년 초 완안부의 기병이 먼저 정주관 밖에 쳐들어왔다. 이에 숙종은 무력으로 여진 정벌을 결심하고 문하 시랑평장사 임간을 시켜 이를 평정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여진군에게 패퇴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왕명을 받고 여진 정벌의 길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추밀원사로 있던 2월 21일 정벌의 책임자로 임명받고 전장에 나가 3월에 여진과 싸웠으나, 이번에도 여진의 강한 기병부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아군의 태반이 죽고 적진에 함몰되는 패전의 장수가 되었다. 결국 임기응변으로 화약을 맺고 일단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패전 뒤 왕에게 전투력의 증강과 기병의 조련을 진언하여 같은해 12월부터 여진 토벌을 위한 준비 확장에 전력을 기울여 나갔다.

그 결과 신기군, 신보군, 강마군으로 구성된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창설하였다. 이와 같이 군제를 개편하고 군사들을 훈련시킴과 동시에 양곡을 비축하여 여진 정벌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1107년(예종 2)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어느 변방의 긴급보고를 접하게 되었다.  이때 원수가 되어 왕으로부터 지휘관을 상징하는 부월을 하사받고 17만 대군을 이끌고 정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휘하에 5만 3,000명을 거느리고 정주에 도착한 뒤 육지와 바다로부터 공격 하였다.

이같이 기세등등한 고려군의 위세에 눌린 여진군이 동음성으로 숨자 정예부대를 동원해서 이를 격파하였으며, 여진군이 숨은 석성을 공격하여 적의 태반을 섬멸시켰다. 이 전투에 135개 처에 달하는 적의 전략적인 거점을 점령하였고, 적의 전사자 4,940명, 그리고 생포 130명이라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즉시 조정에 승전보를 올리고 탈환한 각지에 장수를 보내 국토를 확정하고 그 주변에 9성을 축조하였다. 이어 남쪽에 사는 백성들을 이곳으로 이주 시켜 남도 지방민들이 국경지방 일대에 개척하며 살게 하였다.

새로 성을 구축한 곳과 이주 규모는 함주에 이주민 1,948가구, 영주에 성곽 950칸과 이주민 1,238가구, 웅주에 성곽 992칸과 이주민 1,436가구, 복주에 성곽 774칸과 이주민 680가구, 길주에 성곽 670칸과 이주민 680가구, 공검진에 이주민 532가구 등이다. 이 6성 이외에 이듬해 진양 등지에 3성을 더 쌓아 이른바 "윤관의 9성" 설치가 완결되었다. 오랑캐 땅을 개척한 것이 사방 700여 리에 달했고, 선춘령에 경계비를 세워 고려의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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