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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회 신임 회장 이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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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7.04.0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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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국회의원들의 모임인 대한민국 헌정회는 28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전국 대의원 총회를 열어 제15대 회장으로 이철승(85) 전 신민당 총재를 선출했다.7선 국회의원 출신인 이 신임 회장은 국회 부의장과 대한체육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을 맡고 있다.

소석(素石) 이철승은 1922년 서울 종로구 수표동에서 이석규의 2남5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의(全義)로, 17대 선조가 모악산아래 구이면 장판리에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전주성을 사수한 충경공 이정란장군이 그의 13대 조이고 할아버지 이시형은 전주지방의 3대 거유(巨儒)중 한분으로 꼽혔다.

그의 선친은 경성공업전문(서울공대 전신) 3학년때 3·1운동에 가담,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다
체포되었다. 이 일로 퇴학을 당했으며, 그후 6·25때 퇴각하는 공비들에 살해되었다.

그는 4살때 전주로 내려와 주로 할머니와 중부(仲父)인 이석주(제헌의원) 밑에서 자랐다. 1936년 전주고등보통학교(북중·전주고의 전신)에 입학해서는 일제의 일본어 강요와 창씨개명에 반발, 요시찰학생으로 찍혔다.

당시 전주에서 이철승 학생과 관련, 두개의 일화가 유명했다. 하나는 일본인 학교인 남중(南中)의 학생두목 松尾大佐를 목검으로 두둘겨 팬 일과 전주고보 일본인 교사 노다(野田)를 내동댕이 쳐버린 일이다. 이로 인해 그는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고 졸업직전에야 해제되었다.

이처럼 불온학생으로 낙인찍힌 그는 김성수가 세운 보성전문(고려대 전신)에 1942년 입학하였다. 허나 당시는 학문에만 매진할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1943년 조선인학도 육군지원병령(令)이 발표된 것이다. 그는 경성제대의 이혁기(해방후 좌익계인 국군준비대 총사령관)와 함께 대표가 되어 비밀리에 학병거부운동을 전개했다.

소기(小磯)총독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면담에서는 “학생들까지 끌어가는 것은 조선의 인텔리들을 전장의 소모품으로 처리하려는 술책”이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는 학병지원 마감이 끝난후 학교에 나갔다 일본군에 끌려가 중부군(中部軍) 병참부대에 배속되었다.

해방을 맞아 귀국, 3학년에 복교했다. 당시 보성전문을 비롯 대학에는 좌익세력이 크게
득세하였다. 그는 우익학생들을 규합해 학생회장에 당선되었으며 그 힘이 후일 신탁통치 반대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1945년 12월 28일은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안이 통과돼 미국과 소련이 5년 동안 한국을 분할통치키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한반도의 해방공간은 좌익과 우익, 찬탁과 반탁,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뉘어 한치앞을 내다볼수 없는 ‘시계(視界) 제로’상태에 돌입했다. 각 세력들은 통일을 지향하기 보다는 분단 쪽으로 치달려 갔다.

당초 신탁통치안이 발표되었을 때는 민족진영이고 공산진영이고 모두 반대에 나섰다. 36년간의 질곡에서 벗어나 우리 손으로 자주독립국가를 세우자는 염원이 대세를 이루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련의 지시를 받은 공산진영은 태도를 돌변, 찬탁으로 돌아섰다. 당시 건준- 한민당, 인공- 임정의 대립에 이어 전개된 찬탁-반탁론의 대립은 결과적으로 민족분단을 고착화 시키고야 말았다.

이때 이철승은 반탁학생총연맹을 조직, 위원장을 맡아 반탁운동의 선봉에 서는 한편
전국학생총연맹 중앙위원장으로서 학생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이후 반탁운동은 그를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

어쨌든 남한은 1948년 5·10 총선거를 실시하였고 그는 26살의 나이에 전주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우익의 난립으로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는 6·25 동란때 피난학생 3천여명을 조직화해 전국학련 학도의용군을 편성, 낙동강전선과 대구를 사수했다. 또한 1951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국민방위군들에게 전달해야할 50여억환을 착복, 커가란 물의를 일으켰던 사건을 비밀리에 조사해 국회에서 폭로케 하였다.

1954년 전주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3대 국회에 첫진출했으며 사사오입 개헌파동을 계기로 이승만 독재에 맞서 민주당 창당(대표 신익희)에 참여했다.

이후 자유당은 1956년과 1960년 정·부통령 선거를 통해 이승만 독재를 더욱 공고히 해나갔다. 특히 1960년에는 3·15 부정선거를 감행, 전국민적인 저항에 부딪쳤다. 부정선거 규탄시위중 경찰의 최루탄에 눈을 맞아 절명한 김주열군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 떠올라 시위가 더욱 격화되었다. 이어 벌어진 4·18 고대생 국회의사당 시위는 4·19 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때 이철승은 학생들의 시위를 자제시키는 한편 민주당 정권수립에 앞장섰다. 당시 민주당은 내각책임제와 국회 양원제 개헌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켜 문민정치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그는 민주당 정권에서 국회 국방위원장과 대한체육회 회장, UN 총회 한국대표, 대한역도연맹 회장으로 맹활약 하였다.

하지만 1961년 5·16 군사쿠데타의 발생과 함께 정치정화법에 묶여,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7년간의 정치방학은 가장 촉망받던 젊은 정치인 이철승을 옭아 매었다. 그의 라이벌이었던 김대중과 김영삼은 그 사이 6대와 7대 국회에서 착실히 정치기반을 닦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1968년 8월 그는 해금되었지만 한국야당사에 큰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1970년 9월에 열린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였다.

한국정당사에 있어 가장 극적으로 전개된 이날 대회는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김영삼후보와 김대중, 이철승 후보간의 3파전이었다. 당초 유진산 당수는 이철승을 밀어 주기로 약속했으나 김영삼을 지명했고, 김대중이 이에 불복했다. 결국 ‘명함각서’로 이철승 표를 쓸어간 김대중이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다.

1972년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단행, 헌정을 마비시키고 독재체제를 굳혀 나갔다. 여당인 공화당은 일당국회를 운영했고 계엄령을 선포, 국민투표를 강행했다.이같은 와중에 이철승은
1973년 야당몫의 국회 부의장에 뽑혔다.

1976년 신민당 전당대회는 김영삼 총재의 주류에 비주류인 이철승측이 도전장을 낸 한판 승부였다. 여기서 그는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이때 나온 정치철학이 중도통합론이다. 당시 월남패망을 지켜본 그는 남북대치상황에서 국가의 안보와 자유는 대립적 개념이 아닌 상호보완적인 조화의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즉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라는 흑백논리나 선명론이 이나라 헌정사를 후퇴시켜 왔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국내정치는 서로 경쟁하되, 외교 안보 문제는 초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는게 요지였다. 이는 1978년 박동선 사건으로 불거진 미군철수를 철회시키는등 성과도 없지 않았다. 또한 10대 총선에서 야당이 여당을 유효득표율에서 1.1% 앞지르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당시 암흑같은 독재체제에 진저리를 쳐온 국민들은 오히려 선명성을 내세운 강력투쟁을 원하였다. 당시 그의 중도통합론은 사쿠라라는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1980년 유신정권이 무너지고 전두환정권 하에서 그는 다시 정치규제에 묶였으며 그의 정치적 영향력도 급격히 줄어 들었다.

1985년 전주에서 7선의원에 당선된후 지역감정이 휩쓴 1988년 13대 총선에서 낙선, 8선 고지를 넘지 못하고 실질적인 정계은퇴를 하고 말았다. 이후 1994년 자유민주민족회의 상임의장과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 등으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또한 ‘민족정론’등을 발행하며 국가원로로서 대북정책 등에 조언을 아끼지 않고 있다.

정치원로인 소석은 지금도 왕성한 사회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는 대한민국의 건국이념과 정통성을 선양하고 후대들에게 통일된 조국의 꿈을 안겨 주겠다는 일념으로 서울 종로구 인의동에 있는 자유민주민족회의 사무실에 매일 출근한다. 여기서 미귀환 국군포로와 납북인사의 생사확인및 송환운동 등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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