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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MK그룹 유봉식 회장일본에서 가장 성공한 교포 기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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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6.08.1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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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회장은 '일본에서 가장 성공한 교포 기업인'으로 꼽히는 인물.

   
1943년 16세 때 빈손으로 일본에 건너간 뒤 1960년 교토(京都)에서 택시 10대로 출발해 MK를 일본 굴지의 택시회사로 키웠다. 현재 MK택시는 교토(1200대), 도쿄(東京·250대), 오사카(大捌110대), 고베(神戶·70대), 나고야(名古屋·60대) 등 주로 대도시에서 운행 중이다.

MK그룹은 유봉식 회장과 유태식 부회장이 세운 세계적인 서비스 성공기업이다.

MK창업주의 어린시절
먼저 유봉식 회장은 1928년 6월 23일, 경남 남해의 섬에서 태어났다.
탯줄을 끊고 나오는 순간, 유봉식 회장은 식민지의 아들이었고, 가난한 집안의 셋째 아들이었다. 유봉식 회장이 어릴 때 창씨개명이 있었고, 집안의 다른 사람들이 일본 성으로 유씨인 ‘아리다’로 성을 바꾸었던 반면, 나름대로 양반의식이 강했던 유봉식 회장의 아버지는 기계 유씨와 비슷하게 발음되는 ‘유끼’로 바꾸었다. 아버지의 이러한 혈통의식은 그의 아들인 유봉식 회장이 그대로 이어받아, 일본에서 50여 년 동안이나 사업을 하면서도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고, 아직도 한국국적을 가지고 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던 유봉식 회장은 신문배달과 버스차장 등의 일을 해보지만, 어린 자존심에 상처만 받게 되고 남해라는 조그만 섬에 갑갑증을 느끼게 되고, 더 넓은 세상으로 떠나보고 싶다는 열망을 가졌다. 유봉식 회장에게 넓은 세계는 바로 일본이었다. 일본에는 이미 그의 둘째 형님과 숙부님 일가가 살고 있었다.

대학 중퇴와 취업
어머님의 도움으로 아버지설득에 성공한 유봉식 회장은 가을에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에 도착한 유봉식 회장은 낮에는 막노동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해서 교토에서 손꼽히는 리스메이캉 중학에 입학하게 되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리스메이캉 대학 법학부에 합격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법조계는 공급이 수요를 압도하는 인력 포화상태였다.
고시에 합격하더라도 재일 한국인이 법복을 입을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었다. 기껏 변호사 사무실에서 법률사전이나 뒤적거리며 한평생을 보내야 한다는 것에 한탄했다.
그리고 조국이 전란을 겪고 있는 이 때 대학 졸업장 하나를 챙기기 위해 학교와 집, 막노동판을 전전하는 것으로 시간을 허비하기에는 주변의 상황이 너무나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윤택해지는 일본의 산업발전에 한몫 끼어 들어 야망을 펼쳐보고 싶다는 욕심을 갖게 된 유봉식 회장은 대학졸업을 1년 앞두고 학교를 그만 두고 니시진오리의 한 직물회사에 취직했다. 유봉식 회장이 작은 직물회사에 취직한 이유는 일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본사회를 이해하고, 일본을 속속들이 배우고 파악하고, 나름대로의 사업을 하기 위한 자본을 축척하기 위해서였다.

주유소와 택시회사 창업
10년을 목표로 들어간 회사는 사원들의 집단적인 따돌림과 상사의 회포로 5년 만에 그만두고 외식업에 뛰어 들었다. 하지만 엉터리 3류 요리사의 초빙과 자본의 부족, 그리고 홍보의 부족으로 얼마안가 문을 닫게 된다.
그 후 3개월 후 유봉식 회장은 형님의 도움으로 그 즈음 도산한 니가이 석유회사를 인수했다. 그 동안 니가이 석유는 경영의 악화로 동종업계에 신용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어서 도매상에 전화를 걸어 주문을 해도 석유가 오지 않았다. 그래서 유봉식 회장은 신용을 회복하는 방편으로 다른 회사들은 외상으로 석유를 결제하는 것에 반해, 현금으로 석유를 결제하면서 신용을 회복하게 되고, 이러한 신용을 바탕으로 무제한적으로 석유를 사들이게 되었다.
 어느 정도의 물량이 확보된 이후에는 현금매입에 제한을 두기 시작하면서 석유공급업자로부터 외상매입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박리다매의 매출방식과 다른 석유업자들과의 차별화된 서비스 전략으로 니가이 석유회사는 번창일로를 걷게 되고, 미나미 택시회사를 인수하여 택시업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50여 년이 지난 현재 MK택시는 10대에서 1,200여 대의 택시를 비롯하여, MK석유, MK산업 등 10여 개의 자회사를 거느린 MK그룹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MK는 소비자가 뽑는 이미지가 좋은 회사로 일본의 세계적인 그룹인 미쯔비시 상사, 니혼전기, 혼다 등과 나란히 랭크되는가 하면, 전국 대학생 앙케이트 조사결과 취업하고 싶은 기업 4위로 꼽히기도 했다.


경영 노하우
 
유봉식 회장의 경영철학서 “택시 운전사는 파일럿과 같다. 우주보다 더 무겁고
큰 생명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유봉식 회장의 이 같은 지론은 오늘의 MK택시가 있게 한 중요한 밑거름이었다.
 경쟁업체를 몇 발짝씩 앞질러 온 서비스 혁신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1960년 유 회장이 택시 10대로 사업을 시작했을 때 최대의 골칫거리는 운전사들의 무단결근, 지각, 조퇴였다. 운전사들이 열악한 주거환경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는 것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 회장은 1969년 한 부동산 업체가 내놓은 집 46채를 모두 사들여 싼 가격에 사원들에게 내놓았다. 18년간 월 3만4000엔씩 달돈(월부금)을 내면 집주인이 될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신청자는 전혀 없었다. 당시 택시 운전사의 월급이 7만 엔에 불과해 달돈을 내고 나면 생활을 할 수 없었던 것. 이래서는 ‘마이카’와 경쟁할 만큼 친절한 운전사를 키워 내기 어렵다고 유 회장은 판단했다.


유 회장은 당시 은행 지점장에 필적하는 12만 엔 수준으로 운전사들의 월급을 전격 인상했다. 물론 수지가 맞을 리 없었다. 주위에서는 몇 달 안에 망할 것이라는 말이 무성했다. 그는 매출액 증대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택시는 손님이 타건 안 타건 드는 비용이 일정하기 때문에 매출액을 늘리면 수익이 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유 회장은 단거리라도 고객이 손을 들면 반드시 태우라고 운전사들에게 호소했다.

또 출퇴근 시간을 줄이기 위해 운전사의 자택에 차고를 두는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교통 당국이 제재를 걸고 나섰지만 1년간 싸운 끝에 마침내 허가를 얻어냈다.
유 회장은 “고객에게 친절하기 위해 운전사들을 잘 대우해 주는 것이 요체였다”며
“서비스 혁신 아이디어는 치열하게 고민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은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유 회장의 공식 직함은 '긴키(近畿)산업신용조합' 회장. 택시회사 경영은 세 아들에게 맡겼다. 3년 전 교토의 한 신용조합을 사들인 뒤 교포계 금융기관들이 잇따라 도산하자 2002년 3곳을 추가로 인수했다.

일본의 교포계 금융기관 중 가장 큰 규모로 오사카 교토 등 간사이(關西) 지방에서 교포기업들의 '돈줄' 역할을 하고 있다. “한일관계가 많이 좋아졌지만 교포 중소기업이 일본 은행과 거래하는 데는 여전히 제약이 많습니다. 금융업으로 교포 경제가 되살아나는 데 도움이 되는 게 제 마지막 사명이지요.”

그는 직원들에게 대출고객은 돈이 아쉬워 빌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돈을 써서 은행에 이익을 주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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