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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의 생애와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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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5.11.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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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의 생애와 업적

 

효명세자는 역대 국왕 중에 가장 예술적,문학적 조예가 깊고 뛰어났으며, 무엇보다도 춤을 사랑한 왕이었다.

 

효명세자는 조선 제23대 왕인 순조9년 8월9일,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의 제 1자로 태어나 순조12년(1812) 4세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순조27년 2월18일부터 순조30년5월6일 급서하기 전까지 약 3년3개월 동안 대리청정을 하였다.

그는 당시 안동김씨 세도 정치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순조의 염원과 기대를 한 몸에 지고 부왕의 명을 받들어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대리청정 동안에 아버지 순조의 정치적 염원을 거의 가시화하는 탁월한 정치적 역량을 증명해 보였다.

 

효명세자는 정조의 우문(右文)정치와 위민(僞民)정치를 계승코자 하였으며, 정책적으로는 청의를 표방하고 엄정의리론을 펼쳐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여 대리청정 말기에는 거의 민심을 수습하였다. 대리청정 동안에 그는 예악 정치의 일환으로 궁중 연향과 춤을 다루는 고도의 무용정치를 펼쳐, 효율적으로 안동김씨 세력을 무력화시키는 동시에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는 장치로 활용하였다. 당시 정치,경제적인 이유로 악정(樂政)이 중단되어 정재의 창사조차 제대로 전해오지 않은 상태에서 그는 궁중연향을 개최하면서 왕이 중심이 되는 정치질서를 과시하고 왕실의 위엄과 존왕 의식을 표명하는 정치의식으로 양식화하였다.


그리하여 짧은 통치기간에도 불구하고 전례없이 화려한 황제식 궁중연향들을 벌이면서 궁중무용의 창시와 가사를 직접 짓고, 연향에 쓰이는 치사와 전문을 직접 지어 올리고 이름만 남은 옛 정재들을 자신의 악장으로 되살려 내고, 연향의 규모를 확대하여  왕실의 위엄을 한껏 드러내는 화려한 정재와 연향의 양식을 확립한다.

그리하여 효명세자는 조선 후기 궁중연향과 정재 양식을 새롭게 정립하였으며, 이는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 기축진찬도

그가 정재 창작과 궁중연향에 대해 보였던 각별한 관심과 참여는, 그가 궁중의식과 춤을 왕권강화를 위한 고도의 정치적 수단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리청정을 시작한 지 삼일만에 자신의 하례식의 절차가 잘못되었다는 이유로 안동 김문 계열의 전,현직 예조판서들을 감봉 처리하는 것을 시작으로 자신의 대리청정 말기에 이르러서는 안동김씨 세력을 정치적으로 거의 제거하고 자신의 통치기반을 확고히 할 정도로 정치적으로 안정을 이루었다. 대리청정을 통하여 정치개혁을 시도하고자, 효명은 왕실의 위엄을 보이기 위한 가시적인 조치로 여러 차례의 큰 궁중연희를 개최하면서 궁중연향행사를 총괄하는 진찬소의 당상에 김조순에 맞서는 박종경의 아들을 임명하여 안동김씨 세력을 견제하고 강력한 왕권회복을 통한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효명세자는 연향에 쓰일 정재들을 창작하면서 이름만 전해오던 춤들을 모두 자신의 신작(新作)으로 되살려 내었을 뿐 아니라 전대로부터 전승되어 오던 정재들도  다시금 화려하게 채색하고, 무원들의 수도 늘려 규모를 확대하고 웅장하고 화려한 대규모의 연회에 적합한 정재의 성격을 만들었다. 그리고 중국에서 유래한 당악정재를 향악화하고 당악정재와 향악정재 간에 있었던 형식적,내용적 차이를 불식시켰다. 이는 단지 중국에서 유래한 당악적 요소를 정치적으로 제거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기 보다는 춤이 중심이 되는 향악정재의 예술적인 장점을 강화하려는 방향에서 이루어진 결과라 생각된다.


효명세자는 자신이 대리청정한 3년여의 짧은 기간을 통하여 조선 궁중정재의 수준을 정점으로 끌어올려, 정재를 왕궁문화의 꽃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조 궁중정재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그 결과 효명세자는 조선조 말까지 전해지는 53종의 궁중정재 중  26종의 정재를 직접 예제하고 재창작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 후기의 궁중연향과 정재양식을 새롭게 양식화하고 정비,확충하여 조선정재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그리고 조선조 초기의 정재들이 왕권 창업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도구로 쓰이던 정치적 색채를 퇴색시키고, 효명의 문학작품 세계가 지녔던 자연 대상과 사물들을 본 뒤의 감흥을 춤으로 묘사하거나, 자연의 풍경과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춤, 그리고 이제까지 궁중정재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독무형태의 춤도 등장하며, 창사없이 전문적인 기교를 선보이고, 시각적인 흥겨움을 강조하는 스펙터클한 성격의 정재도 늘어나, 궁중무용의 주제와 소재가 다양해지고 표현방식과 춤 형식 역시 다양해져서 그 예술적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나아가 공연구성에 있어서도 향악정재의 비율을 당악정재에 비하여 월등히 높이고 조선적인 주제를 들여오는 등,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춤의 진경시대를 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가 조선조, 그리고 나아가 우리나라 무용문화 발전에 기여한 바는 그의 짧은 통치기간을 고려해 본다면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할 전무후무한 업적이라 하겠다.

그렇기에 효명세자와 같은 성군의 자질을 갖추고, 뛰어난 예술적 안목을 지닌 왕의 애석한 죽음은 우리나라의 매우 불행한 손실이었다.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정치적 의지가 결실을 맺기에는 시간이 부족해 미완의 정치를 펼쳤지만, 그의 예술적 업적만은 영원히 살아남아 오늘날 우리들에게 전해지고 있다.(문광부자료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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