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예술
서애 류성룡 (西厓 柳成龍)
뉴스인물  |  inmul@newsinmul.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4.08.10  00:00:00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류성룡(중종 37년-선조 40년, 1542-1607)은 경상도 의성현(義城縣) 사촌리(沙村里)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며,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았다.

그는 16세에 향시에 들고 안동 도산(陶山)에 가서 이황의 문하에서 조목(趙穆)·김성일과 동문 수학하였으며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25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로 관계에 나아가 이조좌랑, 도승지, 상주목사, 경상도관찰사, 대사간, 이·예·병조판서와 홍문관 부제학·대제학, 대사간, 대사헌,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는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내정외교 군사를 총괄하였다. 그는 문인이며 유학자였으며 군사에도 뛰어난 지식을 갖고 있어서 임란 중의 청야책(淸野策) 군사훈련, 산성수축 등의 전술은 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말년인 1598년에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그 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1605년 풍원부원군에 봉해졌고, 파직된 뒤에는 고향의 옥연서당에서 임진왜란을 기록한 국보 제132호인  『징비록(懲毖錄)』과 『서애집(西厓集)』, 『신종록(愼終錄)』 등을 저술하였다.

그는 노후에 삼한(三恨)이 있다고 했는데 첫째는 임금의 은혜를 갚지 못한 것, 둘째는 벼슬이 지나치게 많고 높았는데 속히 관직에서 물러나지 못한 것,  셋째는 도학에 뜻을 두었으면서도 이룬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류성룡은 조선왕조를 통해 으뜸가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고 경세가였다.

 

   
 
 
 

 

뉴스인물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뉴스인물 번역기
여백
여백
여백
포토뉴스 PHOTO NEWS
회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인물뉴스 기사 및 모든 컨텐츠에 대한 무단전재,복사,배포를 금합니다'
'본사 임직원은 잡지,신문윤리강령 및 실천요강과 본사 사규를 준수합니다'

Copyright © 2004 ~ 2018 뉴스인물. All rights reserved. mail to inmul@newsinmul.com | 청소년보호책임자 : 허자윤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142-3 LG 에클라트  |  등록번호 : 경기사000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