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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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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5.0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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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선산(善山;일선 一善), 자는 계온(季) ·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성리 도덕의 학문으로 인격을 닦아 인륜의 기강을 바로잡고, 민본의 의리와 고유의 역사 풍토에 근거하여 문명사회의 이상 실현을 추구하였던 문인이요 학자며 정치가였다.

김종직은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등이 수립한 학문 모범을 계승하여, 일상 생활의 범절과 처신에서부터 사회 국가의 경륜에 이르기까지 유자로서의 사상 이념을 실천하여 관철하려는 도덕(道德) 경세(經世)의 학문을 솔선하여, 수많은 후학을 양성함으로써 조선조 도학의 학풍을 넓히고 사림의 종사(宗師)로 추앙되었다.

김종직은 또한 전아하고 건실하며 서정성 시문을 창작하여 조선 전기 제일의 시인으로 칭송되었다. 그의 시문에는 유학자로서 성리 도덕의 학문을 바탕으로 한 깊은 내면 성찰과, 민생이 유족하고 인륜의 기강이 바로 잡힌 문명사회에 대한 염원, 향토의 풍속과 물산과 인정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짙은 애정이 담겨 있어서, 조선조 사대부 지식인의 독특한 문학 전통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김종직이 사림의 종사로 추앙된 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유학의 이념에 입각한 예의 범절의 실천과 교육을 솔선하였다는 점이다. 김종직은 고려 말 조선 초에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킨 명망 높은 학자인 야은 길재(吉再)의 영향과 아버지 강호 김숙자의 훈도를 받아 학도를 가르침에 『소학』의 공부를 중심하였다. 일상 생활의 마음가짐과 언어 행동에서부터 도덕의 수양과 실천을 중심하는 기풍은 젊은 학도들에게 널리 파급되어 한 시대의 새로운 기풍을 이루었다.

 김종직이 지방관으로 부임하여 가장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은 그 지방의 사회 문화를 토대로 풍속을 개선하고 문명의 기풍을 진작하는 일이었다. 그는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향교의 대성전에 나아가 참배하였고, 가는 고을마다 향사례(鄕射禮)와 향음례(鄕飮禮), 양로례(養老禮) 등의 의식을 정기적으로 거행하여 어른을 공경하고 덕성을 존중하며 서로 사양하고 존중하는 예절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지역 사회에서 인간관계의 미덕을 존중하는  기풍을 진작하고자 하였다.

 김종직이 조선 전기 제일의 문인으로 칭송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연의 이치와 사회의 현실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철저한 사실성을 근간으로 하여  엄중한 법도와 전아하고 청신한 기풍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점필재의 시문은 논리가 치밀한 데다가 글이 잘 다듬어져 있고, 학문 수양에서 우러나온 온화하고 차분한 성정이 깊이 함축되어 있다.

 김종직은 인류의 공존을 해치는 불의, 특히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아니하는 패도(覇道)를 미워하였다. 그의 지은 시문에는 권력의 남용과 횡포로 인간관계의 믿음이 무너지고 사회 평화가 파괴되는 비극을 비판하는 내용들이 많이 들어 있다. 김종직은 또한 우리나라의 선량하고 후덕한 풍속을 찾아내어 선양하는 데 힘썼다. 그는 그 문학의 소재와 주제를 우리나라의 토속과 역사 문화의 전통에서 다양하게 취하여 이를 훌륭한 문학 형상으로 다듬어 냄으로써 고유문화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고 선양하였다.

 그는 유학자의 합리성에 근거하여 민심을 현혹하는 근거 없는 미신을 타파하고, 당대의 잘못된 풍속은 바꾸어 나가는데 과감하면서도 한편으로 우리나라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 전통에서 문명국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데 부심하였다. 그는 또한 우리나라 각 지방의 풍물을 매우 자상하고 정감 있게 묘사하여 우리 국토의 풍정을 친밀하고 아름답게 인식시켜 줌으로써 문명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김종직의 문하에는 도덕과 학문과 문장을 겸비한 훌륭한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김굉필과 정여창은 도학(道學)으로 이름이 높았고, 유호인, 조위, 김일손, 권오복, 이주 등은 문학(文學)으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남효온, 홍유손, 정희량 등은 은일(隱逸)의 명사로 알려졌다. 그 밖에도 김종직의 훈도로 덕성과 명망을 이룬 자가 매우 많았다.

 이처럼 김종직은 관직에 나가서나 물러나서나, 서울에 있을 때나 지방에 있을 때나 평생 후진의 교육에 헌신하였고, 지방의 교육 문화의 기풍을 진작하는 데 힘을 기울임으로써, 각 지역의 토착 사림을 중심으로 지방문화를 진흥하고 정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에 김종직의 많은 문도들이 참혹한 화를 당하고, 김종직 자신도 무덤 속의 화를 당함으로 인하여, 왕조 국가에서 유가 사상에 입각한 인간다운 미덕의 실천과 사회 이상의 실현이 얼마나 험난한 일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지만, 김종직과 그 문도들이 추구하였던 포부와 신념은 사림파 학자들에 의해 다방면으로 계승 발전되어 조선조 사대부 문화의 근간을 이루었다. 그런 점에서 김종직은 우리나라의 유가적 문화전통 형성에 선구자의 역할을 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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